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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물] 포충사

작성자 : 관리자 (218.157.13.***)

조회 : 2,188 / 등록일 : 16-12-27 14:14

지정번호 : 기념물 제7호

지정일 : 1974. 1. 22

 

포충사는 임진왜란 당시 호남 지방에서 최초로 의병(義兵) 7천명을 모집하여 금산(錦山) 전투(戰鬪)에서 장렬히 순절한 고경명(高敬命),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 삼부자(三父子)와 유팽노(柳彭老), 안영(安瑛) 등 5위(五位)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액(賜額) 사당(祠堂)으로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書院撤廢) 때에도 장성(長成)의 필암서원(筆岩書院)과 함께 훼철되지 않았던 전남지방 이대서원(二大書院)중 하나이다. 

임란(壬亂)이 끝나고 정국(政局)이 안정된 1601년 호남(湖南) 유생(儒生)들은 충절인물(忠節人物)을 모실 사우(祠宇) 건립을 청하고 광주(光州) 제봉산아래 사당을 건립했으며 이어 1603년에 박지효(朴之孝)와 후손들이 사액(賜額)을 청하여「포충(褒忠)」이란 액호(額號)를 받았다. 사우(詞宇) 내(內) 주벽(主壁)에 고경명(高敬命)을 제향(祭享)하고 동배위(東配位)에 고종후(高從厚), 유팽노(柳彭老), 서배위(西配位)에 고인후(高因厚), 안영(安瑛)을 배향(配享)했다.

배향(配享) 인물(人物)의 행적(行跡)은 다음과 같다.

① 고경명(高敬命)(1533∼1592) :
자(字)는 이순(而順), 호(號는) 제봉(霽峰) 또는 태헌(苔軒)이며, 본관은 장흥으로 부제학(富提學) 맹영(孟英)의 아들이다. 1552년(명종(明宗) 7년)에 진사시(進士試), 1558년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된 후로 호조좌랑(戶曹佐郞),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역임했다. 한 때 벼슬을 떠났다가 다시 영암군수(靈巖郡守), 승정원판교(承政院判校),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역임한 후 1591년 벼슬을 떠나 고향에 쉬던 중 임란을 만나 예순의 고령(高齡)을 무릅쓰고 의병(義兵) 7천여명을 모아 선조(先祖)의 행궁(行宮)이 있던 평안도로 달려갔으나, 가는 도중에 금산(錦山)에서 마주친 왜군(倭軍)과 싸우다 전사(戰死)했다. 후에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금산성곡서원(錦山星谷書院) 종용사(從容祠) 형창화산서원( 昌花山書院)에도 배향(配享)되었다. 저서(著書)에「제봉집(霽峰集)」, 「유서석록(遊瑞石錄)」이 있다.

② 고종후(高從厚)(1544∼1593) :
자(字)는 도중(道仲), 호(號)는 준봉( 峰)이고 고경명(高敬命)의 장남(長男)으로 1570년(선조 3년) 진사(進士)가 되고, 157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내과(內科)로 급제 임피현령(臨陂縣令),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했다. 임란(壬亂) 때 금산전투(錦山戰鬪)에 참가했으나 아버지와 아우를 잃은 뒤 다시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에게 대항했으며, 1595년 진주성이 위태롭게 되자,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들과 함께 진주성 지키기에 전력을 다하였으나 성은 함락되었고, 의분을 못이긴 고종후는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장렬한 최후를 하였다. 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諡號)는 효열(孝烈)이다. 포충사(褒忠詞)와 진주(晋州) 장렬사에 제향(祭享)되었다.

③ 고인후(高因厚)(1561∼1592) :
자(字)는 선건(善健), 호(號)는 학봉(鶴峰)이며 고경명(高敬命)의 둘째 아들이다. 1577년 진사(進士)가 되고 1589년 증광내과(增廣內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고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지냈다. 임란 때 부형과 함께 금산 전투에서 순절했다. 후에 예조참의(禮曺參議)에 추증(追贈)되었고, 인조(仁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가증(加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의열(義烈)이다. 포충사와 금산(錦山) 종용사(從容祠)에 배향(配享)되었다.

④ 유팽노(柳彭老)(1554∼1592) :
자(字)는 군수(君壽), 호(號)는 월파(月坡), 본관(本貫)은 문화(文化)이며 유경안(柳景顔)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先祖)2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홍문정자(弘文正字),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지내다가 고향인 곡성(谷城) 옥과(玉果)에 내려와 있던 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게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양대박(梁大樸), 안영(安映)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서 담양(潭陽)에서 고경명군(高敬命軍)과 합치고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했다. 후에 사간(司諫)에 추증되었다.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금산(錦山)의 종용사(從容祠)에도 제향(祭享)되었다.

⑤ 안영(安映)(?∼1592) :
자(字)는 원서(元瑞), 본관(本貫)은 순흥(順興)이며 교리(校理) 처순(處順)의 증손자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서울에 있는 어머니를 모시러 상경하다가 고경명(高敬命)의 의병군(義兵軍)에 가담하여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금산(錦山) 전투에서 고경명(高敬命)을 보좌하여 싸우다 전사했다. 후에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에 추증되었다. 남원의 충민사(忠愍祠)에도 제향(祭享)되어 있다.

한편 포충사(褒忠詞)에는 충노(忠奴) 봉이(鳳伊), 귀인지비(貴仁之碑)가 옛 사우 입구(入口) 홍살문 옆의 자연석에 새겨져 있어 이채롭다. 이들은 고경명(高敬命)의 가노(家奴)로서 의병(義兵)에 참가했는데, 금산(錦山)전투에서 고경명(高敬命)과 고인후(高因厚)부자가 전사하자 순절한 충의의 인물들이다.

이 밖에 고경명(高敬命)장군의 유품인 친필(親筆) 마상격문(馬上檄文), 목판(木板)(493매(枚))들이 보존되고 있고, 신사우(新祠宇) 건립 때 정기관(正氣館)에 마련된 기록화(記錄畵) 3점이 있는데 「창의거병도(倡義擧兵圖)」(오승윤(吳承潤)그림), 「금산구국혈전도(錦山救國血戰圖)」(오승우(吳承雨)그림),「구국출병도(救國出兵圖)」(양인옥(梁寅鈺) 그림)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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